[이종환칼럼] 폴란드 한인교민 역사가 191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폴란드 첫 한인교민 유경집 일가... 안중근의사 하얼빈 거사 도운 집안
“2월14일은 발렌타인데이로 기억되지만, 안중근의사 사형선고일이기도 합니다.”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부회장을 맡고 있는 남종석 폴란드한인회장으로부터 글머리를 이렇게 시작한 카톡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에 갖혀서 재판을 받고는 이듬해인 1910년 2월14일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리고는 한 달 뒤 3월26일 순국한다.
그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안중근 의사를 도와 거사를 성공시킨 유동하(1988년 독립유공자로 서훈)의 아버지 유경집은 안중근의사 사건후 피신해 모스크바에 거주하다가 1918년경 바르샤바로 이주한 최초의 한인교민이었습니다. 그는 바르샤바 시내에서 한의사로 크게 성공한 후 1937년 만주로 돌아갔고,그의 셋째아들 유동주는 치과의사로 폴란드에 거주하다가, 1988년 한국을 방문한 후 1989년 폴란드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안중근-유경집(아버지)-유동하(장남)- 유동주(3남) 그 가족의 행적은 독립운동 역사의 일부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폴란드에 거주했던 유동주 후손들의 흔적을 찾을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남회장은 “폴란드교민방에 제가 올린 글”이라면서 이같은 내용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의 글을 보고 네이버로 들어가서 유경집을 검색하니, 유동하라는 장남의 이름과 함께 여러 글이 나왔다. 다음은 장남 ‘유동하’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기록이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이 러시아 주재 교민단체신문인 <대동공보>에 보도되면서 이강과 정재관 등 국민회 원동위원들과<대동공보>사 관련 인물들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처단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에서 백발백중의 명사수이며 애국심이 출중한 자로 알려진 안중근이 추천되었다. 이강은 안중근에게 편지를 보냈고 편지를 받은 안중근은 바로 달려와 의거에 대한 구체적 의논에 들어갔다. 안중근은 1909년 3월 연추에서 일제 요인과 친일파들을 제거할 것을 왼쪽 무명지를 잘라 피로써 맹세하고 12명의 동지들과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조직한 바 있는데, 1909년 10월에는 선생(유동하)의 부친 유경집과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 등이 구국혁신을 맹서하고 연서(連書)한 뒤 ‘7인 동맹(同盟)’을 조직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생(유동하)은 부친의 명을 받들어, 안중근과 우덕순이 하얼빈까지 무사하게 도착하도록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여 의거를 결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였다.”
안중근 의사 거사후 하얼빈에서 체포된 유동하 선생은 여순법원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1911년 8월22일 형만기로 출소해 가족과 합류했다. 1912년 2월 초 부친 유경집은 톰스크로 이동해 약국을 차렸다. 유경집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안창호가 북만주 일대를 돌아볼 때 유경집이 안내를 맡았으며 안중근의 가족도 돌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경집은 안중근 모친과 아내, 맏딸, 큰아들, 둘째 아들, 그리고 동생 안정근과 그의 처와 안공근 등 여덟 식구를 코로지포로 오게 하고 후일 목릉에 안착하도록 도왔던 것이다.
1917년 봄, 유동하 선생은 부친과 함께 남러시아의 싸말리아로 들어갔고 가족은 김성백이 있는 이르크츠크로 이주하였다. 유동하 선생의 죽음의 경위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그는 1918년 가을, 시베리아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11명의 애국청년들과 함께 피체되어 싸말리아 강가로 끌려가서 교두에서 총살을 당했다고 전한다. 총살을 앞두고 교두에서 뛰어내려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김용괄이라는 청년에 의해 선생의 죽음의 순간이 밝혀질 수 있었다고 네이버 지식백과는 소개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유동하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렇게 보면 유경집은 장남 유동하를 잃은 후 폴란드 바르샤바로 이주해 최초의 한인교민이 되었고, 3남 유동주는 치과의사로 지내면서 1989년 타계할 때까지 폴란드 교민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를 아는 것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폴란드에서 살아온 우리 선인들을 아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헤아려보는 일과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남회장이 보내온 글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의미가 있네요. 폴란드한인역사찾기모임이나 연구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한번 시도해보시면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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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환 월드코리안신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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